지원한 계기
퇴사하고 5개월쯤. 슬슬 심심하고 좀이 쑤셨다. 저번에 우먼테크 해커톤을 온라인으로 참여해본 이후로, 오프라인 해커톤도 한번 경험해보고 싶다 싶던 참에 친구가 이전 기수 갔다 와서 추천해준 구름톤. "제주도에서 3박 4일 해커톤이라니, 해커톤 겸 여행 아닌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했다.
구름톤은 구름(goorm)에서 주최하는 해커톤으로, 제주도에서 숙소와 식사가 제공되며 기획부터 개발, 발표까지 전 과정을 팀 단위로 진행한다. 16기의 주제는 '문화다양성 증진과 지역경제 활성화' 였는데, 단순히 외국인이나 다문화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제주도민, 이주민, 세대 간 격차까지 폭넓게 포함하는 주제였다.
1일차 — 제주 도착, 세미나, 그리고 아이디어 구상
제주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건 자기소개와 아이스브레이킹. 준비해 간 자기소개가 먹혔는지 1등을 해서 이전 기수 굿즈인 구름 레디백을 받았다. 소소하지만 기분 좋은 시작.
이어진 세미나가 인상 깊었다. 기획자 Windy 멘토님의 '속도는 AI가, 방향은 사람이' 세미나에서는 해커톤에서의 기획 프로세스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문제 정의 방법론이었다.
5 Whys — 내가 겪은 문제에 대해 "왜?"를 다섯 번 파고들면서 진짜 문제를 찾는 방법. 표면적인 현상이 아니라 근본 원인까지 내려가는 훈련이 된다. 그리고 가설 기반 검증. 아이디어를 떠올린 다음 바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이 문제가 보편적인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가?", "타겟이 실제로 이걸 원하는가?"를 먼저 검증해야 한다는 것.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 해커톤처럼 시간에 쫓기는 상황에서는 건너뛰기 쉬운 단계다.
밤에는 다음 날 아이데이션 발표를 위해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제주도의 청년 유출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매년 2,000명 이상의 청년이 일자리와 문화 인프라를 찾아 제주를 떠나고 있다는 데이터를 보고, "청년 창작자를 제주로 데려오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아이디어 — 파일럿제주.
파일럿제주는 젊은 창작자가 제주에서 워케이션하며 파일럿 프로그램처럼 자신의 클래스를 실험하고, 제주도민은 저렴하게 문화를 경험하는 플랫폼이었다. 핵심은 세 명의 주인공 — '파일럿'(2030 창작자), '제주 삼춘'(시니어 멘토), '제주도민'(수강생) — 이 만드는 삼각 선순환 구조. 제주 어르신의 지혜가 젊은 창작자의 날개가 되고, 그게 다시 제주도민에게 새로운 문화로 돌아가는 그림을 그렸다.
2일차 — 아이데이션 발표, 운명적 팀빌딩, 그리고 밤새 기획
다음 날 아침, 준비한 파일럿제주를 발표했다. "80세 할아방에게 제주어를 배운 20대 일러스트 작가가 제주어 캘리그라피 클래스를 만듭니다" — 이런 구체적인 예시까지 넣어서 발표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나랑 비슷한 아이디어를 발표한 기획자 분이 있었다. 워킹홀리데이를 제주로? 라는 컨셉으로 발표했던 기획자 분이었는데, 방향성이 비슷해서 제주 시니어의 기술과 경험을 활용하고, 세대 간 연결을 만든다는 핵심 컨셉이 겹쳤던 것이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끼리 자연스럽게 같은 팀이 되었고, 그때부터 삼춘한수 아이디어를 함께 발전시켜나가기 시작했다.
팀이 된 후에는 논의가 훨씬 깊어졌다. 1일차 세미나에서 배운 가설 검증을 바로 실전에 적용했다.
"시니어에게 뭔가를 배우고 싶은 청년이 정말 많을까?" — 솔직히 확신이 없었다. 리서치를 해보니 청년 대상으로는 니즈가 불명확했다. "왜 굳이 제주까지 와야 하나?" — 단기 알바라면 집 근처에서 해도 되지 않는가. "장기 정착을 전제하면 기존 정책 실패와 뭐가 다른가?" — 제주의 청년 정착 정책이 실패하는 주된 이유가 장기 정착 강요에서 오는 부담, 불명확한 커리어 가치, 정서적 고립감이라는 걸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타겟 전환이 일어났다. 청년이 아니라 관광객. 제주에 이미 와 있는 사람들이라면 "왜 굳이 제주까지?" 라는 질문 자체가 사라진다. 장기 정착이 아니라 단기 체험이라면 진입장벽도 훨씬 낮다. 그리고 시니어도 "도움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수익을 창출하는 주체" 로 재정의했다.
새벽 1~2시쯤 다시 멘토님 피드백을 받았는데, 들으면서 기획자분이 생각한 방향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치만 멘토님의 "잘하고 있다"는 응원과, "서둘렀다가 엎어지는 것보다 오래 고민하는 게 낫다" 는 조언이 큰 힘이 됐다.
3일차 — 아침 바다, 그리고 열나게 코딩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아서 아침에 바다를 보러 갔다. 제주까지 왔는데 코딩만 하고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바다를 보고 나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열나게 코딩. 생각보다 버그가 너무 많아서 열심히 고치고 또 고쳤다. 프론트엔드에서 특히 어려웠던 건 퍼널(funnel) 구현이었다. 원데이클래스 신청 과정에서 사용자 정보 입력 → 클래스 선택 → 예약 확인까지 이어지는 단계별 흐름을 매끄럽게 만드는 게 해커톤 일정 안에서는 꽤 도전적이었다.
4일차 — 장표, 발표, 그리고 대상
마지막 날은 발표 장표 만들기에 집중했다. 좋은 프로덕트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 소용없으니까. 문제 정의 → 타겟 검증 → 솔루션 → 기대효과 순서로, 우리가 왜 이 방향으로 갔는지의 논리적 흐름을 장표에 담았다.
발표가 끝나고 결과 발표. 대상. 솔직히 발표할 때까지도 결과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3박 4일 동안 최선을 다한 것 자체가 만족스러웠는데, 그 노력이 결과로 돌아오니 감격스러웠다.
삼춘한수 — 우리가 만든 것
최종 완성된 삼춘한수는 제주 시니어가 보유한 기술과 경험을 관광객에게 전수하는 AI 기반 원데이클래스 매칭 플랫폼이다.
제주 시니어(삼춘)가 귤 농사, 전통 음식, 해녀 문화 같은 본인의 기술을 등록하면, AI가 이를 기반으로 원데이클래스 커리큘럼을 자동 생성해준다. 시니어가 직접 복잡한 설명글을 쓸 필요 없이 보유 기술만 입력하면 되는 구조로, 디지털 진입장벽을 낮춘 게 핵심이었다.
관광객은 제주 여행 중 단순한 관광지 방문이 아닌, 현지인에게 직접 배우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시니어는 새로운 수입원을 얻고, 관광객은 제주만의 문화를 체험하고,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는 선순환 구조. 처음 파일럿제주에서 그렸던 삼각 선순환의 그림이, 더 현실적이고 검증된 형태로 완성된 셈이다.
내가 배운 것 — 좋은 아이디어보다 검증된 아이디어
사실 해커톤에서 대상을 탄 것보다 더 값진 건, 기획 프로세스를 몸으로 배운 것이다.
개발자로 일하면서 기획은 늘 "기획자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어진 기획서대로 만들면 됐으니까. 그런데 구름톤에서 처음으로 문제 정의부터 시작했고, 그 과정이 쉽지 않다는 걸 체감했다.
5 Whys로 문제를 파고들기. 처음엔 "제주에 청년이 없다"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왜? 일자리가 없어서. 왜 일자리가 없지? 관광업 위주의 계절성 일자리뿐이라서. 왜 그게 문제지?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지 않으니까. 왜 청년이 와야 하는 건데? ...여기서 멈칫했다. 어쩌면 "청년을 데려오는 것" 자체가 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겟 전환의 근거를 데이터로 찾기. 제주도는 전국에서 평균 연봉이 가장 낮고 물가는 비싼 지역이다. 청년 정착 정책은 장기 체류를 전제로 하지만, 현실적으로 주거비 부담과 또래 커뮤니티 부재로 대부분 단발성에 그친다. 반면 제주를 방문하는 관광객은 이미 체류 중이고, 단기 체험에 대한 지불 의사가 있다. 타겟을 바꾸자 모든 게 명쾌해졌다.
"좋은 아이디어"와 "검증된 아이디어"는 다르다. 파일럿제주도 나름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니어에게 배우고 싶은 청년이 많을까?"에 확실히 "예"라고 답하기 어려웠다. 삼춘한수는 타겟을 바꾸고 기존 정책 실패 사례를 분석하면서, 왜 이 방향이어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됐다. 그 차이가 결과를 만든 것 같다.
마무리 — 해커톤이 남긴 것
3박 4일이 이렇게 빠르게 지나갈 줄 몰랐다. 퇴사 후 좀이 쑤셔서 지원한 해커톤이었는데, 돌아보니 꽤 많은 걸 얻었다.
기획자, 디자이너, 백엔드 개발자와 밤새 논의하며 하나의 프로덕트를 만든 경험. 멘토님들의 피드백을 받으며 방향을 수정하고 다시 달리는 과정.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히 기능을 구현하는 개발자가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책을 설계하는 프로덕트 엔지니어로서의 시야를 얻은 것.
해커톤이 끝나고 나서도 팀원들과 연락을 이어가고 있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과 짧은 시간 안에 깊은 유대가 생기는 건 해커톤만의 매력인 것 같다.
혹시 해커톤에 참여해볼까 고민하는 분이 있다면, 일단 지원해보시길. 결과와 상관없이 그 과정 자체가 성장이 된다. 물론 대상을 타면 더 좋고.
하단 링크에서 내가 직접 작성한 '삼춘한수' 프로젝트 기획 소개를 확인할 수 있다.
